국가정보원장은 국내 정보기관의 정점이다. 역대정권에서 국정원장은 단순히 정보기관장의

위치를 넘어 대통령 최측근이자 권력의 핵심 자리를 차지했다. 이는 국정원장이 수천명의

정예요원과 수천억원의 은밀한 예산을 쓸 수 있기 때문에 가능한 얘기지만 무엇보다 정기적으로

대통령과 얼굴을 맞댈 수 있다는 점이 크게 작용해왔다. 대통령과 비밀스런 대화를 할 수 있는

특권은 국정원장과 국정원의 ‘힘의 원천’이 되어온 것이다.

◆도청보고 받은 김영삼 대통령 = 역대 국정원장은 정기적으로 대통령을 만났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 출범한 국정원의 전신인 중앙정보부장은 1주일에도 몇 번씩 대통령에게

대면보고를 했다고 한다. 군부출신인 전두환·노태우 대통령도 마찬가지였다.

중앙정보부장 또는 국가안전기획부장은 1주일에 한두번씩 청와대에서 대통령을 1대1로 만났고

도청과 미행 등 첩보활동을 비롯 수천명의 요원들이 망원을 통해 입수한 정보를 보고했다.

보고내용에는 여야정치권과 고위관료, 대기업 회장, 재야시민단체의 움직임이 샅샅이 포함됐고

대통령은 이를 통해 정적을 아우르거나 때론 압박하면서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는게 역대

국정원 종사자들의 증언이다. 역대 대통령들은 국정원의 보이지않는 도움을 통해 막강한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셈이다.

민간인 출신의 김영삼 대통령도 국정원의 마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국정원이 국내주요인사들을

도청해 얻은 정보를 대면 또는 서면보고를 통해 정기적으로 수령했다. 2인자로 불렸던 김 대통령

아들 현철씨도 국정원에 측근인 김기섭씨를 운영차장으로 심어놓고 수시로 대면보고를 받은

것으로 훗날 검찰수사를 통해 밝혀졌다.

김대중 대통령 시절부터 대통령과 국정원장의 관계에 미묘한 변화가 생겼다.

1대1 보고가 사라진 것. 청와대 참모가 배석했다. 국정원장이 은밀하게 대통령과 소통하던

창구가 사라진 셈이다.

노무현 대통령도 마찬가지였다. 노 대통령은 집권초기엔 아예 정례적인 독대보고를 거부했다.

특별한 일이 있을 때 보고를 받거나 참모들이 무더기로 배석한 가운데 국정원장을 만났다.

과거처럼 권력자와 정보기관장의 은밀한 대화는 애당초 불가능해졌다.

김대중·노무현 대통령은 국정원장의 정기적인 독대보고가 권위주의 정권의 폐습이라는 인식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공식화된 시스템을 벗어난 음지 권력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려 했던 셈이

다. 이명박 대통령은 국정원장의 정례적인 대면 독대를 사실상 부활시킨 것으로 알려진다.

정보기관을 국정운영에 이용하겠다는 의중으로 해석됐다. 이명박정부 초대국정원장을 지낸

김성호 원장은 열흘에 한번꼴로 청와대를 찾아 국내외 정치와 경제 전반을 보고한 것으로

권력핵심부는 전했다.

하지만 과거 원장의 독대보고처럼 ‘애틋’한 맛은 없었다는 전언이다. 보고일정 자체를

대통령실과 일일이 조율해야했고 기간도 부정기적이었다.

◆참여정부 초기엔 아예 거부 = 권력핵심부에선 대면보고 내용에 불만을 품기도했다. 촛불시위에

대한 정확한 분석과 대처를 내놓지 못했고, 경제위기 상황에서도 쓸만한 보고를 하지 못한다는

불만이었다.

청와대 관계자는 “은행이 자기 몸보신에 급급해 돈을 풀지 않는다고 대통령이 수차례

강조했을 때 국정원이 나서 실태를 조사하고 대책을 보고해야했지만 그러질 못했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 직계의원은 “국정원장이 법조인 출신이다보니 준법과 원칙만 내세울 뿐 정권을 위한

아이디어를 내는데 자기 몸을 던지지 않는다”고 비판하기도했다.

하지만 김 원장측은 억울하다는 표정이다. “필요한 내용은 대책까지 포함해 충분히 보고했는데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거나 수용하지 않았을 뿐”이라는 불만이다. 권력내부의 파워게임에서

밀렸다는 분석도 나온다. 김 원장은 임기 1년도 채우지 못하고 불명예제대했다.

후임엔 이 대통령의 최측근인 원세훈 전 행안부장관이 취임했다. 원 원장은 취임한지 한달만에

고위급 인사를 대폭 물갈이했다. 최근엔 2∼4급 중간간부 인사까지 마무리했다. 국내담당

요원들의 경우 ‘출입처’도 대폭 조정했다.

원 원장이 대통령과 정기적으로 독대보고를 하는지는 불분명하다. 인사청문회 때는

“국가의 중요정보사항이 있으면 형식을 떠나 대통령에게 보고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청와대 안팎의 얘기를 종합해보면 원 원장은 국정원 인사를 위한 보고를 제외하곤

독대보고는 개시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정치권에선 원 원장이 정기적인 독대보고를

하지 않는다고해서 실세가 아니라고 보는 것은 무리라고 해석한다. 대통령과 워낙 각별한 사이라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여러 채널을 통해 수시로 소통할 것이라는 관측이다. 원래 측근이고

실세이기 때문에 눈에 띄는 독대보고를 통해 국정원장의 위상을 끌어올릴 필요성을 못 느낀다는 것

이다.

엄경용 기자 rabbit@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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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내일신문